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마누엘 칸트 (문단 편집) === 원했던 교수직, 원하지 않았던 과목 === 1770년 3월 16일, 마흔여섯 살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강사 생활을 하고 있던 칸트는 비밀 국가예산 장관이자 육군 장관인 폰 퓌어스트 운트 쿠퍼베르크 남작에게 긴박한 편지 한 통을 쓴다. 그는 이 편지를 통해 막 공석이 된 교수직에 응모한다. 그러니까 하루 전날, 최고재판소의 사제이자 수학 교수인 랑한젠이 지루한 병환 끝에 죽은 것이다. 이미 칸트는 1756년에도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으나 허사였고, 또 2년 뒤의 교수 지원에서도 외면당했다. 칸트가 처한 상황에는 극적인 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대학 강사로서의 보수는 한푼도 받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데다 수강생들이 대개 강의료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궁핍한 삶에 익숙해 있었며, 어쨌든 사강사로서 칸트는 빚을 지지 않고도 서적상인 칸터의 집에 있는 두 방의 방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 50년대 말부터는 전직 군인 출신인 마르틴 람페[* 마르틴 람페(Martin Lampe)는 원래 프로이센 군대에 복무하던 군인이었다. 그는 군인을 그만두고 칸트의 하인으로 40년간을 살았다. 람페는 매일 새벽 5시 15분 전이 되면, 불침번하는 군인처럼 칸트의 방으로 들어와서 "교수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Mr. Professor, the time is come.)"라고 군대식의 큰소리로 칸트를 깨웠다. 그러나 칸트도 늙고 람페도 늙자, 람페는 칸트의 돈을 맘대로 쓰기 시작했고, 이를 본 바지안스키가 칸트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래서 칸트는 죽기 2년 전인 1802년에 람페를 해고한다. 그럼에도 칸트는 람페를 극진히 생각했고, 유언장에 람페에게 연금을 준다고 썼다. 람페는 칸트가 죽은 해부터 연금을 받았다. [[https://www.jehsmith.com/1/2013/02/immanuel-kant-and-his-man-servant-lampe.html|#]]]를 하인으로 고용하고 식당에서 매일같이 좋은 식사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었고, 1766년 2월부터는 왕립 궁정도서관의 부사서로서 약간의 돈도 벌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 연구를 위해 책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기쁨까지 덤으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칸트는 교수단의 정회원으로서가 아니라 무보수의 사강사로서 벌써 15년 동안 활동한 셈이었다. 그동안 칸트는 기진맥진할 때까지 주당 평균 20시간씩 가르쳤고, 또 부지런히 저술 활동을 해왔다. 그는 이제 젊은 학창시절 눈앞에 그렸던 학자 생활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졌다.[* 1770년 3월 16일, 마흔여섯 살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강사 생활을 하고 있던 칸트는 비밀 국가예산 장관이자 육군 장관인 폰 퓌어스트 운트 쿠퍼베르크 남작에게 긴박한 편지 한 통을 쓴다. 그는 이 편지를 통해 막 공석이 된 교수직에 응모한다. 그러니까 하루 전날, 최고재판소의 사제이자 수학 교수인 랑한젠이 지루한 병환 끝에 죽은 것이다. 이미 칸트는 1756년에도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으나 허사였고, 또 2년 뒤의 교수 지원에서도 외면당했다. 그는 교수단의 정회원으로서가 아니라 무보수의 사강사로서 벌써 15년 동안 활동한 셈이다. 칸트는 기진맥진할 때까지 주당 평균 20시간씩 가르쳤고, 또 부지런히 저술 활동을 해왔다. 그는 이제 젊은 학창시절 눈앞에 그렸던 학자 생활에 진전이 없을까 두려워졌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198)] [* 칸트가 처한 상황에는 극적인 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대학 강사로서의 보수는 한푼도 받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데다 수강생들이 대개 강의료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궁핍한 삶에 익숙해 잇었다. 어쨌든 사강사로서 칸트는 빚을 지지 않고도 서적상인 칸터의 집에 있는 두 방의 방값을 지불할 수 있었으며, 50년대 말부터는 전직 군인 출신인 마르틴 람페를 하인으로 고용하고 식당에서 매일같이 좋은 식사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1766년 2월부터는 왕립 궁정도서관의 부사서로서 약간의 돈도 벌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 연구를 위해 책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기쁨까지 덤으로 누릴 수 있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199)] 그런데 칸트의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가 단 하나 있었다. 칸트는 세계에 대한 이론적 지식 체계에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에 윤리 교수직을 맡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세계 전체, 즉 우주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도덕철학적 반성들에도 자리가 마련되었다. 지상의 인간이 천체의 체계보다 더 중요하다. 칸트는 1768년 5월 9일에 자신의 옛 학생인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점을 밝히고 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이 이론적 지식 체계들에 대한 "깊은 무관심"에 빠져 있음을 알리고 있다. 자신에게는 실제로 "본래의 숙명과 인간의 인식 능력과 성벽의 한계만"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도덕이 중심에 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도덕형이상학"을 작업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면서, 칸트는 이 도덕형이상학의 원칙을 규정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 이 사강사는 자신의 철학적 숙명과 직업 목표가 다행스럽게 일치하는 윤리 교수직을 바라게 된 것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01)] 공석이 된 자리가 수학 교수 자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겸손하게 장관에게 일종의 교환 제안을 했다. 사람들이 그 공석의 교수직을 고인의 사위인 크리스티아니에게 맡기면 어떨까? 카를 안드레아스 크리스티아니는 윤리 교수이기는 하지만, 훌륭한 수학 전문가이기도 하다. 칸트 자신에게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해결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칸트)는 윤리 교수직을 지원하면서, 귀하(폰 튀어스트 장관)께서 내려주실 존귀한 서언을 겸손히 희망하며 내 본래의 숙명을 따를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의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가 단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랑한젠이 수학자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칸트는 감히 자신의 기대를 "나의 기량과 성벽에 적합한 그러한 자리들에만 한정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가장 겸손하게 일종의 교환 제안을 했다. 사람들이 그 공석의 교수직을 고인의 사위인 크리스티아니에게 맡기면 어떨까? 카를 안드레아스 크리스티아니는 윤리 교수이기는 하지만, 훌륭한 수학 전문가이기도 하다. 칸트 자신에게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해결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칸트)는 윤리 교수직을 지원하면서, 귀하(폰 튀어스트 장관)께서 내려주실 존귀한 서언을 겸손히 희망하며 내 본래의 숙명을 따를 생각"이기 때문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00)] 하지만 윤리 교수직 임명에서 칸트는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는 "우리는 임마누엘 칸트 선생을 ...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정교수로 그지없이 자비롭게 임명하고 받아들였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칸트는 마침내 교수가 되었지만 이는 절반의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칸트가 자신의 삶에서 바랐던 행복, 즉 윤리와 도덕이라는 실천적 분야에서 자신의 숙명을 따를 수 있는 행복은 왕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봉쇄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이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칸트는 10년을 더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 책, 즉 『순수이성비판』의 탄생은 의무감에서 비롯된 곤경의 해결책인 셈이다.[* 드디어 쾨니히스베르크 철학자의 계속되는 운명뿐만 아니라 근대의 서양 문화사 일반을 결정하는 일이 일어났다. 윤리 교수직 임명에서 칸트는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국왕이자 주인인 프리드리히 2세는 "우리는 임마누엘 칸트 선생을 ...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정교수로 그지없이 자비롭게 임명하고 받아들였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칸트는 마침내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불확실한 성공이었다. 왜냐하면 칸트가 자신의 삶에서 바랐던 행복, 즉 윤리와 도덕이라는 실천적 분야에서 자신의 숙명을 따를 수 있는 행복은 왕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이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칸트는 10년을 더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중략) 그 책, 즉『순수이성비판』은 의무감에서 비롯된 곤경의 해결책인 셈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03~204)] 원하지 않았던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강의와 반복 수업을 수행하며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교수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특히 청중들에게 형이상학ㆍ자연지리학ㆍ인간학에 대한 그의 강의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의 강의는 "유머와 분위기로 흥을 더했다." 1762년부터 1764년까지 칸트 밑에서 공부한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가 이러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의 "열려 있으면서 사색으로 다듬어진 이마는 깨뜨릴 수 없는 명랑함과 즐거움의 자리였고, 가장 풍부한 사유를 지닌 대화는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으며, 유머와 즐거운 분위기는 그의 뜻대로 되었다." 그의 강의는 더욱 유명해져서, 학생들이 필사한 칸트의 강의록은 학계에 널리 퍼졌다. 그렇지만 칸트는 이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1778년 8월 28일에 헤르츠에게 전했듯이, 특히 자신의 형이상학 강의와 관련하여 "강의록을 통해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강의는 "유머와 분위기로 흥을 더했다." 1762년부터 1764년까지 칸트 밑에서 공부한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가 이러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의 "열려 있으면서 사색으로 다듬어진 이마는 깨뜨릴 수 없는 명랑함과 즐거움의 자리였고, 가장 풍부한 사유를 지닌 대화는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으며, 유모와 즐거운 분위기는 그의 뜻대로 되었다." 그가 식탁 모임에서 즐겨 이끌어냈던 생동감 넘치는 큰 웃음에 대해서도 익살스러운 근거가 떠오른다. 친구들의 모임에서 한 재치 있는 장난꾸러기가 순수한 마음으로 기대했던 긴장을 갑자기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을 때, "그 웃음은 항상 근육의 흔들림으로 소화에 도움을 준다. 이것은 의사의 지혜로운 처방전보다 오히려 소화를 더 잘 촉진시킨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30~331)] [* 칸트는 강의와 반복 수업을 수행하며 교수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특히 청중들에게 형이상학ㆍ자연지리학ㆍ인간학에 대한 그의 강의는 매우 흥미로웠고, 학생들의 강의록은 학게에 널리 퍼졌다. 그렇지만 칸트는 이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1778년 8월 28일에 헤르츠에게 전했듯이, 특히 자신의 형이상학 강의와 관련하여 "강의록을 통해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18)] 칸트는 자신의 임명을 처음부터 미심쩍게 평했던 교수 동료들과는 거의 사교적인 접촉을 갖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사소한 경쟁과 술책에 관계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또한 그들의 고지식한 "학자적 자만과 현학"에 대해서도 기꺼이 비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괴팍한 외톨이인 것은 아니었다. 칸트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잡담하고 농담하며 논쟁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칸트가 "식탁 모임"이라고 부르는 그 모임에는 학자와 지성인 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가정주부들도 있었다. 이들 모두는 칸트와 함께한 모임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칸트는 장난꾸러기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생동감 넘치는 큰 웃음을 재치있게 이끌어내곤 했다. 식사를 한 뒤 칸트는 대개 네덜란드 나무숲이나 나중에 "철학자의 길"로 알려진 강변길을 걸었다. 신선한 공기와 자유로운 운동 속에서 좋은 생각이 생긴다는 것이 칸트의 지론이었다.[* 칸트는 자신의 임명을 처음부터 미심쩍게 평했던 동료들과 거의 사교적인 접촉을 갖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사소한 경쟁과 술책에 관계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또한 그들의 고지식한 "학자적 자만과 현학"에 대해서도 기꺼이 비웃었다. 칸트는 매일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르는 공공 식당의 다양한 사람들을 더 좋아 했다. 그는 지적인 호언장담과 인위적인 허식을 증오했다. 칸트의 사회적 교제에 관한 다음의 글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 철학의 사회적 교제에 관한 다음의 글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 철학자는 비틀린 정신이나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보다는 마을의 주막에서 더 편안할 수 있다." 칸트는 함께 잡담하고 농담하며 논쟁하는 세속적인 친구들과의 교제를 가장 좋아했다. 그가 매일 만나는 가장 친한 친구인 영국 상인 조지프 그린이 거기에 속하고, 또한 그린의 사업 상대인 로버트 머더비, 법률가이자 문필가인 요한 게오르크 세프너가 거기에 속한다. 그리고 특히 프레겔 섬 위에 있는 , 당구장이 딸린 식당 "게르라흐"에서 자주 식사를 함께하던 시청 형사계 행정관 테오도르 고트리프 히펠도 거기에 속한다. 식사를 한 뒤 칸트는 대개 네덜란드 나무숲이나 나중에 "철학자의 길"로 알려진 강변길로 산책을 가곤 했다. 좋은 생각은 신선한 공기와 자유로운 운동 속에서 생길 것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18~219)] [*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괴팍한 외톨이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임에도 즐겨 참여했다. "이 단체는 학자와 지성인의 모임이기도 했고, 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가정주부들의 모임이기도 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의 갖아 신뢰할 만한 친구인 영국 상인 조지프 그린과 그의 대화 상대였던 로버트 머더비, 그리고 젊은 동료 크리스티안 야콤 크라우스, 논쟁을 즐기는 요한 게오르크 하만, 군비위원인 요한 게오르크 셰프너와 은행 관료인 빌헬름 루트비히 루프만, 매우 애매한 법학자이자 작가인 테오도르 고트리프 히펠, 게다가 수많은 학문적 친구들과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의 교양 있는 많은 부인들, 이들 모두는 칸트와 함께한 모임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칸트는 "식탁 모임"을 좋아했다. 이 모임에서 그는 "우울한 비판적 세계의 현인"이 아니라, "빛이 충만한 대중적인 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훌륭한 근거를 올바르게 제시했다. 끊임없이 자신의 무거운 생각을 끌고가야만 하는 철학자에게 공동의 식사는 부담을 줄여주는 향유이기 때문이다. "철학하는 학자에게 혼자 식사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그에 비해 공동으로 식사하고 마시는 것은 건강한 일이라 하겠는데, 그런 자리에서 사람들은 고독한 사유로 인한 압박감 없이 사교적으로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농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29~330)] [* 그가 식탁 모임에서 즐겨 이끌어냈던 생동감 넘치는 큰 웃음에 대해서도 익살스러운 근거가 떠오른다. 친구들의 모임에서 한 재치 있는 장난꾸러기가 순수한 마음으로 기대했던 긴장을 갑자기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을 때, "그 웃음은 항상 근육의 흔들림으로 소화에 도움을 준다. 이것은 의사의 지혜로운 처방전보다 오히려 소화를 더 잘 촉진시킨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30~33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